이제는 고아도 국물도 안 나올 정도로 우려먹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개념을 다시 떠올려 보면...응? 왜 갑자기 또 진화 얘기가 나오냐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면역(immunity)의 개념이야말로 생명의 진화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천면역의 기본 개념은 말 그대로 몸 속으로 들어온 병원균을 먹는(phagocytosis) 작용인데, 이건 심지어 단세포생물인 아메바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수억년의 시간을 거쳐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고..
다시 돌아가서, 생명체는 그 안에 있는 유전자를 후대로 물려주는 것이 생존의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라고 하면 그 특유의 도킨스식 설명이 되고, 결국 간단히 말해 개체가 유전자를 후대로 많이 물려주도록 적응(adaptation)하는 것이 장땡이다. 하지만 생존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개체의 적합성(fitness)이 올라가야 하는데, 하루를 48시간으로 산다든가 같은 물질에서 에너지를 두 배씩 뽑아내지 않는 한 자기의 적합성을 올리는 데에는 당연히 한계가 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수십억년간의 진화를 거듭해 온 현재 지구상의 미생물들께서는, 주로 다른 개체를 견제하는 방법을 통해서 자신의 적합성을 유지하는데, 그 방법은 바로 화학전 그 자체이다. 페니실린으로부터 시작한 수많은 항생제(antibiotics)들이, 사실은 미생물들이 경쟁상대들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 내는 물질들인데, 이걸 분리해서 구조를 분석하고, 효능을 좋게 하기 위해 작용기 몇 개를 슬쩍 바꿔 만든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는지? (사실 이런 화학전은 단세포 대 단세포뿐 아니라 인간과 감염균들과의 사이에서도 일어나는데, 예를 들자면 허구헌 날 우리 몸에서 세균과 맞닥뜨리는 부분인 상피세포들이 다양한 종류들의 anti-microbial peptide들을 만들어내는 것을 들 수 있겠다.)

그림 1. 모든 항생제의 어머니 페니실린. 다들 아시는 푸른곰팡이의 전가의 보도.
내가 아닌 건 다 처리해버렷! (근데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그런데 생존경쟁을 단순히 미생물들간의 드잡이질(…)이 아닌 단세포 vs 다세포의 수준으로 넓혀보면, 다세포생물들은 좀더 고상한 방식의 자기방어체계를 갖출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다세포생물의 큰 장점 중 하나인 생존에 필요한 일을 각각의 기관과 세포가 분업함으로써 시스템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서, ‘내가 아닌 건 전부 처리해버리는’ 세포들을 만드는 것이다! 오오.
...근데, ‘내’가 누구지? 주변을 둘러보면 나같이 생긴 놈은 별로 없고, 길쭉길쭉하게 생긴 놈, 뚱뚱하게 생긴 놈, 끄트머리에 삐죽삐죽한 거 달린 놈, 다 제각각인데? 그냥 다 때려잡으면 되는건가효?

그림 2. 실로 다양한 인간의 세포들.
자,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다세포생물들을 구성하는 각각의 세포들은 기하학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제각각 다르다. 물론 핵 속에 들어있는 genomic DNA의 정보는 대략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불심검문도 아니고 지나가는 세포의 핵을 하나하나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내 세포' 만도 이렇게 다양한데, 어느 정신에 '내가 아닌 세포'를 찾아서 때려잡냐고?
바로 이 피아식별의 문제가, 다세포생물의 면역 시스템이 맞닥뜨리는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로, 대충 면역학 교과서의 절반 이상이 어떻게 이 과정을 수행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할애되어 있다. 게다가 단순히 이론적으로 중요한 것뿐이 아니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푸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세 사람-선천성 면역(innate immunity)의 핵심 개념인 pattern recognition을 연구한 Beutler와 Hoffman, 그리고 후천성 면역(adaptive immunity)의 방아쇠로 작용하는 수지상 세포(dendritic cell)를 발견한 Steinman이-올해 노벨 생리학상을 받은 것이다.

그 자세한 얘기는 다음 글에...
(여담이지만 이 피아식별의 문제나 기타 여러가지 유사성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면역 시스템을 전쟁에 비유하곤 하는데, 적의 탐지(recognition)-무력화(neutralization)/제거(removal)와 같은 일련의 반응들을 살펴보면, 실제로 두 현상에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점은 한 번 짚고 넘어가고 싶다. 물론 몸 속에서 별 문제 안 일으키고(사실은 도움까지 주면서) 조용히 살거나, 심지어 몸 밖에 있는 미생물들 때려 잡겠다고 선제적 타격따위는 하지 않는 우리의 몸은 (아, 물론 정상적인 상황에서)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 때려잡겠다고 돈과 시간과 생명을 물쓰듯 하는 모 나라보다는 훨씬 점잖은 것이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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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남기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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